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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의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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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족의분포

계양부(桂陽府)를 중심으로 그 주변 씨족 분포의 흐름을 살펴보면


고려 초기 이후 부평 이씨가 대성을 이루었고 고려 후기에서 조선조 초기에는 수주 김씨와 김해 김씨 등 김씨 다수의 고을로 변했다가 다시 밀양 박씨가 대성을 이루어 계양부 제일의 대성씨가 되었다.

조선조 중기 이후에 살기 시작한 전주 이씨가 번성하여 박씨는 수효가 줄고 가는 곳마다 이씨가 대성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계양부 고을의 고려조 때 토박이 성씨는 부평 이씨와 수주 김씨를 위시한 10여 개 성씨에 불과했고 조선조 때부터 토착한 성씨는 밀양 박씨와 전주 이씨 등 모두 28개 성씨이다. 위의 성씨 중 조선조 중기 이후 씨족의 문벌을 으뜸으로 자랑삼던 5대 명문 씨족과 그 외 씨족별 거주 상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갈개(작전동 가현마을)
태종의 둘째 아드님 효령대군의 후손으로 대사간(大司諫)을 지낸 영신군(永信君)의 가문을 들 수 있다.
둘째, 당뫼(堂山 : 東陽洞)
성종의 10남 경명군(景明君)의 손자 순강군(順康君)과 12남 무산군(戊山君)의 손자 순평군(順平君)의 가문이다.
셋째, 고리울(오정구 古康洞, 城址洞)
세종 때 명장 공장공(恭莊公) 변종인(卞宗仁)의 후손으로 지금은 삼변(三卞)의 명문으로 통하는 밀양 변씨(密陽 卞氏)의 가문이다. 삼변이란, 근세의 공장공의 19대 손인 산강(山康) 변영만(卞榮晩), 일석(逸石) 변영태(卞榮泰), 수주(樹州) 변영로(卞榮魯) 등 삼형제를 말함이다. 이들 중 산강은 영문학자로, 일석은 학자 및 정치가로, 수주는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우리 나라 학계와 정치계의 대들보였다.
넷째, 검바위(西區 黔岩洞)
연산군 때 둔적(遁迹)한 허암(虛菴) 정희량(鄭希良)의 아우 희신(希信)의 후손으로 공신 정도영(鄭道榮)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 해주 정씨(海州 鄭氏)의 가문이다
다섯째, 시시내(西區 始川洞)
조선조 중기 이후 대사간 류태동(柳泰東)을 시발로 많은 문관과 학자가 배출된 학자 가문으로 명성 높은 진주 류씨(晋州 柳氏)를 손꼽았던 것이다.
전주 이씨(全州 李氏)
조선조 중기부터 살기 시작한 부평 제1의 대성씨로서 효성동, 동양동, 다남동, 갈산동, 산곡동 등에 집성촌을 이루어 10~30호씩 살았고, 적게는 작전동, 병방동, 목상동, 갈현동, 오류동, 청천동, 산곡동, 공촌동, 신현동에 각5~10호씩 흩어져 살아왔다.

동양동(東陽洞)의 경명군파(景明君派)
성종의 10남 경명군의 손자 순강군(順康君) 이선린(李善麟)이 이곳에 정착하였는데 그 아들 필형(必馨)의 지용이 뛰어나 인조 14년(1636) 무과에 급제하고 수군절도사로 공을 세워 영국공신과 청백리에 녹천된 명문이다. 교지(敎旨) 3매가 증손댁에 보존되어 있다.

동양동(東陽洞)의 무산군파(茂山君派)
성종의 12남 무산군의 손자 순평군(順平君) 이선봉(李善鳳)이 이곳에 낙향하여 정착하였는데 아들 필혐 (必嫌)은 한성판관(漢城判官)을 지냈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이선봉의 아내 현부인(縣夫人) 영월 엄씨 (寧越 嚴氏)와 그의 며느리인 판관 필혐의 아내가 강화성(江華城)으로 피난을 갔는데 성이 함락되어 고부가 함께 자결하였으며 인조 16년(1638) 열녀정려(烈女旌閭)를 내렸다. 그후 정려는 소실되고 현판(懸板)만이 차종손(次宗孫)댁에 보관되어 있다. 경명군의 아들인 능성군(陵城君)이 후무(後無)하여 무선군의 손자 순강군이 출계(出系)되어 가문을 이었다. 순강군과 순평군은 형제지간으로 후손은 당뫼 (堂山:東陽洞) 한 마을에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갈산동(葛山洞)의 임영대군파(臨瀛大君派)
세종의 넷째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으로 갈산동에 약 350년 전부터 대성을 이루어 지금도 살고 있다. 문중에 이 찰 이 율 형제는 효성이 지극하여 현종 11년(1670) 효자정려(孝子旌閭)를 내려 참의(參議)에 증직된 효자가문이다. 이 정려각은 근래까지 종손댁 옆에 잘 보존되어 있었는데 도시화에 밀려 묘소가 있는 갈현동(葛峴洞)에 이전되어 있다. 후손들이 많이 분산되어 이사가고 지금은 20여 호가 살고 있다.

작전동(鵲田洞)의 영신군파(永信君派)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孝寧大君)의 후손인 영신군 이 이(李 怡)가 명종 때 대사간(大司諫)을 지냈고 그 후손들이 새별이(曉星洞)에 대성촌을 이루게 되니 이촌말(李村)이라 불려왔다. 현재 갈개(佳峴:鵲田洞)에는 종손만이 살고 있고 그 일부가 갈산동에 분거 되었는데 지금도 효성동과 갈산동에는 30여 호가 살고 있다. 이 문중에 영신군의 손자 이대성(李大城)은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으며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왜장에게 항거하다 살해된 충신이다. 이후 참의에 추증된 그의 묘소는 장흥(長興) 선영에 있다. 또 이 가문에는 영조 3년(1727) 효자로 지평(持平)을 제수받은 이진욱(李震郁) 병조참판 이재민(李齊閔)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된 명문이다.

다남동(多男洞)의 해안군파(海安君派)
중종의 둘째아들 해안군의 후손이 조선조 후기부터 역굴(多男洞)에 정착하여 대성씨로 집성촌을 이루어 지금도 30여 호가 살고 있으며 그 후손의 일부가 나무서리(木霜洞), 갈현동(葛峴洞), 부평동(富平洞) 등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작전동(鵲田洞)의 부평 이씨(富平 李氏)
신라 말기부터 부평의 호족으로 고려조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인 이희목(李希穆)을 시조로 하여 대대로 충신 효자의 명문 높은 가문으로 번창하였으며 그 후손이 된밭(鵲田洞) 및 인천의 학익동, 문학동, 주안동에 집단 거주해 왔다.
굴재(橘峴洞)의 합천 이씨(陜川 李氏)
조선조 초기부터 개경주(佳亭洞)에 집단 거주하여 대성촌을 이루고 살아왔는데 지금은 모두 분산되어 굴재(橘峴洞)에 몇 호만이 살고 있다. 문중에 선산부사(善山府使) 이윤희(李胤禧) 등 몇 명 정도 벼슬한 분이 있고 숙종 2년(1676) 효자정려를 받은 이동진(李東振)이 나온 명문이다.
작전동(鵲田洞)의 김해 김씨(金海 金氏)
김해 김씨는 신라시대부터 곳곳에 살고 있는 대성씨이다. 씨족마을은 새대(鵲田洞), 갈산리(葛峴洞), 선주지(仙住地洞), 깊이울(深谷洞)에 많이 살고 있다.
용종동(龍宗洞)의 경주 김씨(慶州 金氏)
옛날부터 여러 곳에 살았는데 씨족마을로는 용마루(龍宗洞), 선주지(仙住地洞), 고련이(公村洞)에 많이 살았다.
작전동(鵲田洞)의 광산 김씨(光山 金氏)
고려 때는 선주지(仙住地洞)에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조선조 후기부터 까치말(鵲田洞)에 집성촌을 이루어 현재 광산 김씨 대표 마을이 되고 있다.
효성동(曉星洞)의 안동 김씨(安東 金氏)
조선조 후기부터 새별이(曉星洞)에 살기 시작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김촌말(金村)이라 불리어 왔다.
계산동(桂山洞)의 한양 조씨(漢陽 趙氏)
고려조 후기에 개경주(佳亭洞)에 많이 살았으며 그 후 조선조 초기 무렵에는 부평읍(桂山洞)과 동수재이 (富平洞)에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모두 흩어지고 계산동에 한두 집이 살고 있다.
계산동(桂山洞)의 평양 조씨(平壤 趙氏)
수백년 전부터 이곳에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모두 떠나고 한두 집이 살고 있다.
박촌동(朴村洞)의 밀양 박씨(密陽 朴氏)
고려 때부터 굴재(橘峴洞)에서 살았는데 지금은 몇 호가 살고 있다. 박씨는 조선조 초기부터 박촌말 (朴村洞)에 살기 시작한 후 그 후손이 번성하여 집성촌을 이루어 박씨마을인 박촌말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웃 마을인 방축동(防築洞), 병방동(兵防洞), 임학동(林鶴洞), 부평동(桂山洞) 등지에 분거되어 한 때 부평부에는 5백호나 되는 대성씨를 이루었다. 지금도 이곳에는 박씨들이 집단적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이들 문중에서 6~7명의 무관들이 배출된 바 있다. 또 조선조 초기부터 갯말(元倉洞)에 살기 시작한 밀양 박씨 문중은 집성촌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10여 호가 살고 있다. 이 문중에서 부사(府使) 장군 등 5~6명의 인물이 배출되었다. 또 새별이(曉星洞)와 열우물(十井洞)에도 옛날에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몇 호만이 살고 있다.
오류동(梧柳洞)의 파평 윤씨(坡平 尹氏)
선조 28년(1595) 부평부사 윤명선(尹明善)은 명 조상인 문숙공(文肅公) 윤 관(尹 罐)이 고려 때 수주지주사 (樹州知州事)를 지낸 바 있어 이를 감명 깊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오리울(船串)에 낙향하였다. 그 후손들이 오이울(梧柳洞)과 새오개(新峴洞)에 대성씨의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또 후손들 일부는 병방면(兵防洞)과 구월동(九月洞)에 분산 거주하고 있다. 이 문중에서 칠효자(七孝子)가 나왔으니 4형제 (起坡 興坡 堀坡 弘坡)와 그 자손인 정(珽) 상우(尙友) 서(曙) 등으로 4정려가 내려진 효자 명문이다.
귤현동(橘峴洞)의 진주 강씨(晋州 姜氏)
조선조 인조 때 이조참판 겸 대사헌을 지낸 복천(復泉) 강학년(姜鶴年)이 굴재(橘峴洞)에 낙향하여 그 후손들이 굴재와 임학골(林鶴洞)에 대성을 이루어 근세까지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지금은 몇 호만이 살고 있다. 또 고잔(景西洞)에 조선조 초기부터 진주 강씨가 많이 살았는데 지금은 10여 호가 살고 있다.
효성동(曉星洞)의 풍천 임씨(豊川 任氏)
조선조 후기에 새별이(曉星洞)에 집단 거주하여 임촌말(任村)이라 불러왔으며 지금도 10여 호가 살고 있다. 또 옛날부터 마제이(淸川洞)와 깊이울(深谷洞)에 많이 살고 있다.
용종동(龍宗洞)의 경주 최씨(慶州 崔氏)
현재 경주 최씨는 계산동 등 부평에 몇 호씩 살고 있지만 옛날 고려 때 고련이(公村洞)에 집단거주한 대성씨였다. 용마루(龍宗洞)에는 수군절제사 절충장군 최영상(崔榮常)의 후손들이 많이 거주하여 왔는데 지금은 몇 호가 살고 있을 뿐이다.
용종동(龍宗洞)의 달성 서씨(達城 徐氏)
달성 서씨는 용마루(龍宗洞)와 가재울(佳佐洞)에 터를 잡고 옛날부터 많이 살아왔다. 지금은 용마루에 몇 호만이 살고 있으나 가재울에는 많이 살고 있다. 그리고 마을 뒷산을 달성 서씨의 산이라 해서 서달산 (徐達山)이라 불러왔으며 문중에는 임진왜란 때 전공을 세운 서경서(徐景瑞) 장군이 있다.
작전동(鵲田洞)의 순흥 안씨(順興 安氏)
순흥 안씨는 조선조 중기부터 새대(鵲田洞) 벌말(上野洞) 연일(連喜洞) 등지에 살았는데 지금은 각기 몇 집씩 살고 있을 뿐이다.
방축동(防築洞)의 밀양 당씨(密陽 唐氏)
조선조 초기부터 방축말(防築洞)에 집단 거주한 당씨 마을로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정조 때 좌수 당문보가 있다.
동양동(東陽洞)의 안동 권씨(安東 權氏)
조선조 말기부터 당뫼(東陽洞)에 살기 시작하여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문중에 많은 인물이 배출된 명문이다. 또 옛날부터 봄무굴에도 많이 살아오고 있다.
서운동(瑞雲洞)의 나주 임씨(羅州 林氏)
1910년 한일합병이 되던 해 도두머리(瑞雲洞)에서 살기 시작하였는데 지금도 5~6호가 살고 있다.
이화동(梨花洞)의 평강 채씨(平康 蔡氏)
옛날부터 배꾸지(梨花洞)에 집단 거주하여 지금도 많이 살고 있다.
오류동(梧柳洞)의 의령 남씨(宜寧 南氏)
조선조 초기부터 오리울(梧柳洞)에 집단 거주하여 대성씨를 이뤘는데 지금도 몇 호가 살고 있다. 의령 남씨 가운데는 세종 때 주전소(鑄錢所)를 감독하고 박연(朴堧)과 함께 악기를 제작한 과학자인 대호군 남급(南汲) 장군이 있다.
목상동(木霜洞)의 장수 황씨(長水 黃氏)
옛날부터 나무서리(木霜洞) 당뫼(東陽洞) 가재울(佳佐洞)에 살기 시작한 이래 지금도 몇 호씩 살고 있다.
갈현동(葛峴洞)의 풍천 노씨(豊川 盧氏)
갈산리(葛山洞)와 고잔(景西洞)에 옛날부터 살아 왔는데 지금도 몇 호씩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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